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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에서 전기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장거리 여행 때마다 같은 고민이 반복됩니다. 충전소를 중심으로 경로를 짜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목적지에 급속 충전기가 있을지 미리 확인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전기차 오너라면 누구나 한 번쯤 "충전 걱정 없이 그냥 주유하고 멀리 가고 싶다"고 생각해 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상을 실현한 방식이 등장했습니다.

엔진을 싣고 다니지만, 엔진이 바퀴를 굴리지 않는 차 — 바로 EREV(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입니다. 그리고 현대차그룹이 그 첫 번째 주인공으로 제네시스 GV70을 낙점했습니다.

오늘은 EREV가 정확히 어떤 기술인지, GV70 EREV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 기술이 정말 전기차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1. EREV란? — 엔진을 '발전기'로만 쓰는 차

EREV는 Extended-Range Electric Vehicle의 약자로,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라고 부릅니다.

이름에 전기차가 들어가지만 엔진이 포함되어 있어 분류상으로는 내연기관차에 가깝습니다. 전기차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단 하나, 구동은 전적으로 전기모터가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엔진의 역할은 오직 하나, 배터리가 부족해질 때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만드는 것뿐입니다. 엔진이 직접 바퀴에 동력을 전달하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사실 이런 구조는 오래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각국에서 운행 중인 디젤 기관차가 대부분 이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다만 EREV는 디젤 기관차와 달리 배터리를 플러그인으로 외부 충전할 수 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덕분에 평상시에는 순수 전기차처럼 조용하고 매끄럽게 운행하다가, 장거리에서는 주유를 통해 주행거리를 늘릴 수 있습니다.

엔진이 배터리 충전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회전수만 유지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내연기관차보다 연료 효율이 훨씬 높습니다. 한 번의 주유와 충전으로 1,000km를 넘는 주행거리가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이브리드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와는 구조부터 다릅니다. 일반 하이브리드는 상황에 따라 엔진이 직접 바퀴에 동력을 전달하고, PHEV 역시 엔진과 모터가 구동을 분담합니다. 반면 EREV에서는 바퀴가 처음부터 끝까지 100% 전기모터의 힘으로만 구동됩니다.

그 결과 순수 전기차와 거의 동일한 주행 질감이 나옵니다. 엔진 개입에 따른 변속 충격이나 구동계 전환의 이질감이 원천적으로 없기 때문입니다.

2. 제네시스 GV70 EREV — 2027년, 현대차그룹 첫 EREV

현대차그룹은 EREV 기술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그 첫 적용 차종으로 제네시스 GV70을 선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올해 현대차가 단행한 대규모 투자 목록에 EREV가 포함되어 있었고, GV70을 시작으로 EREV 시스템을 점차 확대 적용한다는 방침이 전해졌습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2027년 출시를 앞둔 GV70 EREV는 한 번의 주유와 충전으로 약 1,070km를 주행하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아직 공식 스펙이 발표된 단계는 아니므로 확정 수치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목표로 이해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현대차의 목표는 흥미롭습니다. EREV에 비슷한 크기의 순수 전기차보다 절반 이하 수준의 배터리를 사용하면서도, 전기차에 가까운 동력 성능을 구현하겠다는 것입니다.

순수 전기차의 주행거리를 늘리려면 일반적으로 배터리를 더 많이 넣어야 합니다. 하지만 배터리가 커질수록 차량 가격과 중량이 함께 올라가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EREV는 평소 운행에 필요한 배터리만 쓰고, 장거리 주행은 엔진 발전으로 보완하는 전혀 다른 해법을 제시하는 셈입니다.

현대차그룹 차량개발담당 만프레드 하러 부사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EREV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전기차의 기존 장점인 즉각적인 고토크와 정숙한 실내 환경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긴 주행거리를 더할 수 있다. 일상에서는 전기차로 사용하다가, 장거리 여행을 가야 하는 경우 차량의 내연기관이 전기를 생성해주기 때문에 굳이 EV 충전소를 중심으로 세심하게 경로를 짤 필요가 없다."

밴쿠버에서 장거리 여행을 다닐 때 느꼈던 불편을 정확히 짚은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3. EREV·PHEV·하이브리드 — 헷갈리는 전동화, 한 번에 정리

전동화 차량의 종류가 늘어나면서 용어가 헷갈린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세 가지를 구동 구조 중심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이브리드(HEV)

  • 엔진과 모터가 함께 바퀴를 굴립니다.
  • 외부 충전이 불가능하고, 주유만 하면 됩니다.
  • 충전 환경이 불편한 분에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입니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 외부 충전이 가능하고, 엔진과 모터가 구동을 분담합니다.
  • 평일에는 짧게 전기로 타고, 장거리는 엔진으로 갑니다.
  • 단, 충전을 자주 하지 않으면 장점이 크게 줄어듭니다.

실제로 국제청정교통위원회(ICCT)가 유럽의 실제 운행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PHEV의 실제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공식 시험치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습니다. 운전자들이 시험에서 가정한 것보다 충분히 충전하지 않는 것이 주요 원인으로 지적됐습니다. 충전하지 않는 PHEV는 무거운 배터리와 엔진을 모두 싣고 휘발유를 쓰는 차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

  • 바퀴는 100% 전기모터만 굴립니다.
  • 엔진은 발전기로만 작동합니다.
  • 외부 충전도 가능하고, 주유로도 주행거리를 늘립니다.

이쯤 되면 "그냥 PHEV 아니냐"는 의문이 드실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엔진이 바퀴를 굴리느냐의 여부입니다. EREV는 엔진 개입이 전혀 없으므로 순수 전기차의 주행 감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주유로 거리를 보완합니다.

4. 주유소 가는 전기차가 대세가 될까 — 누가 사면 좋을까

EREV는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이미 EREV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 램 1500 REV: 순수 전기 픽업 계획을 접고 EREV에 무게를 실었습니다. 92kWh 배터리와 3.6리터 V6 발전용 엔진으로 총 주행거리 약 1,110km를 목표로 합니다. 2027년형으로 출시될 예정입니다.
  • 스카우트: 2027년 테라 픽업트럭과 트래블러 SUV의 EREV 모델을 준비 중인데, 예약 고객의 약 85%가 순수 전기차보다 EREV를 선택했다고 밝혔습니다.
  • 지프 그랜드 왜고니어 EREV: 램과 같은 92kWh 배터리와 3.6리터 V6 엔진을 사용하며, 총 주행거리 805km 이상을 목표로 합니다.
  • 포드: F-150 라이트닝의 후속 모델을 EREV로 전환하며, 목표 주행거리는 1,127km 이상입니다. 기존 전기 픽업의 약점이었던 장거리 견인 능력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미국 전기차 전문매체는 전기차 세액공제가 사라지고 순수 전기차에 우호적이지 않은 시장·규제 환경이 형성되면서 EREV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렇다면 EREV는 누구에게 좋은 선택이 될까요.

  • 집이나 직장에서 충전할 수 있고, 주말에는 장거리 운전을 자주 하는 분이라면 EREV가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전기차처럼 타면서 장거리 충전 부담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반면 매일 밤 충전할 수 있고 하루 주행거리가 일정한 분이라면 순수 전기차(BEV)의 장점을 가장 많이 누릴 수 있습니다.
  • 충전 환경이 불편하고 공용 급속충전소를 찾아다니는 것이 부담스러운 분에게는 기존 하이브리드(HEV)가 여전히 현실적인 선택입니다.

다만 솔직하게 짚어야 할 점도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아직 선택할 수 있는 EREV 모델이 거의 없고, 실제 판매가격과 연비, 발전용 엔진의 소음, 정비비, 중고차 가격 등은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전기차 구매를 망설이게 만드는 배터리 수명에 대해서도 과도하게 단순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차량 데이터 분석업체 지오탭이 2만 2,700대 이상의 전기차를 분석한 결과, 평균 배터리 성능 저하는 연간 약 2.3% 수준이었습니다. 다만 높은 출력의 급속충전을 반복하거나 고온 환경에서 사용할수록 열화 속도가 빨라지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결국 차종을 고를 때는 연료비나 충전비만 볼 것이 아니라 차량 구입가격, 충전 환경, 연간 주행거리, 정비비, 배터리와 하이브리드 시스템 보증기간, 몇 년 뒤 중고차 가격까지 함께 계산해야 합니다.

몇 년 전까지 자동차 산업의 질문은 단순했습니다. "언제 모든 자동차가 전기차로 바뀔 것인가."

지금 자동차 업체들이 보여주는 움직임은 질문 자체를 바꾸고 있습니다. 모든 자동차가 꼭 같은 방식의 전기차가 돼야 하는가.

EREV는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입니다. 2027년 GV70 EREV가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그때 다시 한 번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