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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신차 리포트] 사우디 첫 전기차 '시어 엑소봇' — 걸윙도어에 1111마력, 오일머니의 전동화 승부수
늘 부족한 국어 교사의 캐나다 살이 2026. 9. 30. 11:00밴쿠버에서 전기차를 일상적으로 타고 다니는 입장에서, 지난주 들려온 중동의 소식은 꽤나 역설적이었습니다. 최대 산유국 중 하나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자국 최초의 자동차 브랜드를 선보였는데, 그 첫 차가 하필 전기차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걸윙도어에 1000마력이 넘는 출력을 앞세운 플래그십 모델입니다. 석유로 부를 쌓은 나라가 '탈석유'의 상징인 전기차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든다는 것, 그 자체가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사우디의 첫 전기차 '시어 엑소봇'의 공개 내용을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1. 석유 왕국의 첫 차가 전기차인 이유 — '비전 2030'과 시어의 출범
시어(Ceer)는 2022년 사우디 국부펀드(PIF)와 대만의 폭스콘이 합작해 출범시킨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자동차 브랜드입니다. 지난 9월 21일(현지시각), 킹 압둘라 경제도시(KAEC)에 위치한 시어 제조단지에서 첫 플래그십 모델인 '엑소봇(EXOBOT)'의 세단과 SUV가 세계 최초로 공개됐습니다. 이 자리에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겸 총리 겸 PIF 이사회 의장이 직접 참석해 자동차 산업을 국가 경제의 핵심 동력으로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이번 공개의 배경에는 사우디의 국가 비전인 '비전 2030'이 있습니다. 석유 의존 경제에서 벗어나 산업을 다각화하겠다는 구상인데, 자동차 산업이 그 핵심 축 중 하나로 지목된 것입니다. 시어 측이 밝힌 전망에 따르면, 시어는 2034년까지 사우디 국내총생산(GDP)에 80억 달러 이상 기여하고 무역수지 개선에도 210억 달러 이상 기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과거 재규어랜드로버나 도요타와의 협력이 무산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국부펀드의 자본과 글로벌 기술 파트너십을 앞세워 실질적인 양산 체제 진입을 선언한 셈입니다.
2. 걸윙도어와 1111마력 — 엑소봇의 스펙 들여다보기
엑소봇의 외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문입니다. 길이 3m에 달하는 대형 걸윙도어가 위로 열리고, 앞뒤 좌석 사이의 B필러는 아예 제거됐습니다. 전장이 5m를 넘는 대형 차체에 2.4m 길이의 전면 윈드실드가 완만하게 누운 쐐기형 실루엣을 이룹니다. 시어 측은 이 디자인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자연경관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사우디 현지에서 설계와 엔지니어링을 모두 수행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짐 드루카 최고경영자(CEO)는 고강도 소재를 활용해 B필러 없는 구조에서도 충분한 차체 강성을 확보했다고 밝혔습니다.
기술적인 뼈대도 글로벌 합작의 결과물입니다. 폭스콘이 차량의 전기·전자 아키텍처를 담당했고, BMW가 엔지니어링 기술을 지원했습니다. 공개된 제원에 따르면 두 모델 모두 112kWh 배터리를 탑재해 유럽 WLTP 기준 480~650km의 주행거리를 확보했으며, 일부 보도에 따르면 최상위 트림의 최고 출력은 1111마력에 달합니다. 일부 전문 매체는 트라이 모터 구동계와 800V 급속충전 기술이 적용됐다고 전했습니다. 차량 보증은 6년 또는 20만km, 배터리 보증은 8년 또는 20만km 조건이 제공됩니다. 다만 차량 가격과 계약금, 한국을 포함한 해외 시장 출시 일정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판매는 2027년 초 사우디 현지에서 먼저 시작될 예정입니다.
3. 순수 전기차에서 하이브리드까지 — 스타트업의 좌초를 반면교사 삼은 신중한 확장
흥미로운 점은 시어의 사업 전략입니다. 시어는 순수 전기차 전문 브랜드로 출발했지만, 최근 글로벌 시장의 수요 변화를 반영해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와 내연기관 모델까지 라인업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최근 몇 년간 여러 전기차 스타트업이 무리한 확장과 자금난으로 좌초한 전례를 의식한 행보로 읽힙니다. 실제로 드루카 CEO는 자신이 과거 최고경영자로 재직했던 베트남 빈패스트의 대규모 구조조정 사례를 언급하며 스타트업 운영의 위험성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시어는 2027년 초 사우디 내수 판매를 시작으로, 2028년부터 2030년까지 5개의 대중형 모델을 순차적으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2030년까지 구축될 전체 라인업은 7개 모델 규모이며, 이후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판매를 확대한다는 구상입니다. '빨리 많이 파는 것'보다 '버티면서 넓히는 것'을 택한 셈인데, 오일머니를 등에 업은 신생 브랜드치고는 이례적으로 신중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한국과의 연결고리 — 부품사 수주 기회와 현대차·기아의 과제
이번 소식이 한국 독자들에게도 남의 일만은 아닌 이유는, 엑소봇의 공급망 곳곳에 한국 기업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도에 따르면 현대트랜시스는 일체형 전기차 구동시스템을, 현대케피코는 차량 제어장치와 컨버터를, 신영은 차체 부품을 대거 공급합니다. 또한 미국의 리어, 독일의 벤텔러, 중국의 팡신과 함께 한국의 신영이 사우디 현지 공장 구축에 합류했으며, 시어는 2034년까지 부품 현지화율을 45%로 끌어올릴 방침입니다. 현지 진출을 타진하는 국내 부품사들의 수주 효과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입니다.
다만 완성차 업체 입장에서는 마냥 반가운 소식만은 아닙니다. 사우디는 현대차와 기아가 도요타에 이어 점유율 2위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핵심 시장입니다. 그런데 시어가 2028년부터 대중형 모델을 출시하며 주력 라인업을 확장할 경우, 한국 완성차 업체들과 판매 영역이 직접 겹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특히 사우디 정부의 지원을 받는 시어가 관용차 등 정부 조달 시장을 우선 점유할 가능성이 거론됩니다. 현대차 역시 사우디 현지 합작 공장 가동을 앞두고 있지만, 같은 대주주(PIF)의 지원을 받는 자국 브랜드와의 경쟁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가격이 공개되지 않은 만큼 엑소봇의 시장 파괴력을 지금 예단하기는 이릅니다. 하지만 세계 최대 산유국이 첫 차로 전기차를 선택했고, 그 과정에 한국 부품사들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심장합니다. 석유 이후의 시대를 준비하는 사우디의 방식이, 전동화 전환의 한복판에 서 있는 한국 자동차 산업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2027년 판매 개시 시점까지 찬찬히 지켜볼 일입니다.

